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사랑의 본질

Oct 31, 2015·
Sumin Han (Immanuel)
Sumin Han (Immanuel)
· 7 min read

1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 무의미한 것이다.

니체는 어떤 대답을 우리에게 해 줄까?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집착하였다. 사랑이 힘의 의지라면 테레자는 토마시의 강함에 이끌려 그의 마음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항상 신분상승의 욕구를 지녔으니. 테레자가 토마시의 바람기에도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한 것은, 어쩌면 토마시를 이기기 위해, 그의 강함을 초월한 힘을 자신이 얻기 위함 일 지 모른다. 끝내 그가 한 마리의 토끼가 된 것은 테레자의 승리를 의미할 지 모른다.

사랑에서의 승자란 마음을 얻는 쪽을 의미한다. 마음을 주는 쪽은 패자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니체라면 사람은 누구나 초인 (Übermensch)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년의 토마시는 테레자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않았을까? 바구니에 담겨 떠내려 온 아기가, 결국엔 자신이 지탱하고 행복을 가르쳐준 스승이 된 것이다.

2

삶의 이유는 무엇일까? 나 자신도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타적인 삶이 가장 이기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쉽게 와 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에는 한계가 없다.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랑을 지켜낼 것이다. 수많은 문학과 과학, 기술이 사랑으로부터 탄생하였다. 이는 물질을 초월하는 가장 강한 힘이다.

사랑이란 추락일까? 토마시는 잘나가는 외과의사에서 한낱 시골뜨기가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불필요한 존재. 하지만 애초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존재란 무엇인가? 그들은 신을 믿고 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신이 되었든, 종교적인 신이 되었든, 신을 향한 사랑을 실현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논하는 신은 끝없는 싸움을 통해 강해져서 자신에게 더 가까이 와주기를 바란다. 신에게 하루 빨리 다가가기 위해, 현실의 세계에서의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자도 존재할 것이다. 니체는 그런 신들은 죽었다고 말했겠지만.

토마시가 믿었던 신은 무엇일까? 그는 여신을 믿었다.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멈추지 않으며, 테레자에 정착하거나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가장 약하다고 생각하는 존재, 테레자에게 패배했다. 자신의 모든 행실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빼앗아간 존재, 말년의 그는 여신을 테레자에게서 찾았다.

3

성공이란 무엇일까? 성공이란 숫자놀이다. 0이란 실패, 1이란 성공을 의미한다면, 세상은 0과 1로 구성된 정보세상이다. 세상에 떠돌아 다니는 1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여행을 다닌다. 책을 읽든, 사람을 만나든, 사람들은 자신의 0인 부분을 1로 채우기 위해 공부한다. 0을 1로 만들기 위한 가장 첫 단계는 0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 불만족의 상태. 자신의 결핍을 찾아야 무엇을 1로 만들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0을 1로 만드는 방법은 정보화 시대에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얻을 수 있지만 자신에게 숨어있는 0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성공이란 시간과 무관하다. 시간은 뇌 활동에 따라 상대적이다. 누군가는 두 배의 빠른 계산속도를 가질 것이고, 누군가는 절반의 계산속도를 가질 것이다. 뇌의 계산속도는 책을 읽는 속도, 정보를 습득하는 속도와 관련있다. 따라서 한 번 발견한 0을 1로 만드는 작업은 사람마다 그 속도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0을 발견하는 것은 운이다. 나보다 멋진 사람을 만나는 것, 내가 부족한 점을 발견해주는 스승을 만나는 것, 내가 가지지 못한 힘을 일깨워주는 벗, 이것은 운명적인 존재라 볼 수 있다.

0을 발견해 주는 것은 대화가 가능한 상대이다. 이는 인간 뿐 아니라 자연에도 해당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주로 혼자서 연구를 했던 과학자들은 분명히 자연과 끊임없이 대화했을 것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일 수록 0을 1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0을 발견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라는 존재는 ‘너’라는 존재와 대화할 때 동시에 ‘너’안의 ‘나’를 발견한다. 그것이 ‘나’라는 존재 속의 1일 수도 있고 0일 수도 있다. 1은 이미 가진 것에 대한 공감일 것이고, 0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족의 발견일 것이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 강렬한 이유는 서로는 태생부터 자신들만 알고 있는 0과 1을 갖고 때문이며, 동성에 대한 사랑이 가능한 이유는 여전히 서로에게서 0과 1을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사랑을 0과 1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현재의 미래학자들, 특히 유엔미래보고서 2045와 같은 책에 등장하는 학자들의 대답은 yes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은 인간이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에 합당한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며 따라서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연결하여 mind-uploading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이란 결국엔 0과 1의 이진 신호로 이해될 수 있는, 환상 같은 것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세상의 모든 정보에 접근하여 스스로 0을 발견하고 이를 1로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질 것이다. 인간의 지능을 초월한 인공지능이 탄생하는 시점, 그것을 구글의 미래학자 레이커즈와일은 기술적 특이점이라 부르며 그 이후의 세계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이 새로운 종족을 만든 셈이기 때문에. 우리가 개미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랑이 0과 1로 설명될 수 있다면, 테레자와 토마시, 프란츠와 사비나가 왜 서로에게 끌리게 되었을지 설명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토마시가 테레자에게 발견한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에로틱한 우정에서 불만족 되었던 그 무엇, 프란츠가 사비나에게 끌렸던 것은 자신의 애국활동과 반대되는 사비나의 조국과 가족에 대한 배신이 아니었을까? 미래학자는 그 안에는 복잡한 0과 1의 신호가 존재한다 말할 것이다.

5

살아있음이란 무엇일까? 변화가 없는 삶을 살아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어제보다 나은 내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더욱 인간을 성숙시키고 강하게 만든다. 이것을 작가가 이야기 하는 직선적인 인생을 의미 할 것이다.

반면 카레닌, machinae animatae로써의 삶은 단지 존재할 뿐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뿐인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떠한 삶을 택하든 함부로 누군가의 삶과 사랑을 평가 할 수 있을까?

대가를 바라고서 삶을 사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것은 순수한 행위는 아니다. 설령 그 사람이 위대한 기업가이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겨 이름을 남긴 자라도, 그들은 단지 자본주의의 신이나 학문의 신을 만족 시켰을 뿐 그것을 추앙하는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더욱이 그것을 목적으로 하여 자신이 고생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란다면 그것이야 말로 악하다고 볼 수 있다. 애초부터 유명세나 아름다움과 같은 가치는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기도 하지만, 더 좋은 유전자를 자손에게 남기기 위한 동물적인 무의식적 의지일 뿐 이성적인 합리적 판단은 아니다. (이는 헤겔 좌파,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면서 더욱 확실해 졌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을 순수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결혼 상대를 재력, 집안, 능력, 외모 등을 점수화 하여 산수를 통해 판단하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반면 감성적인 사람을 순수하다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른다. 동물과 비슷한 단계의 판단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산수를 통해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사랑, 테레자의 카레닌과의 사랑이 토마시와의 사랑보다 낫다고 말하는 이유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를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바꾸려 들지 않았다. (482p)

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랑이란 각자가 믿고 있는 신에 대한 환상의 투영이다. 따라서 각자는 자신이 믿고있는 신을 완성시키기 위한 부분을 상대방으로부터 갈구하는 주관적인 행위이다. 여기서 주관적이라는 것은 각자의 악보를 완성하기 위한 음표를 상대방으로부터 얻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 모두는 각자의 악보를 채워 나가는 중일 것이며, 한번 시작한 멜로디가 중간에 급격히 변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의 삶도 급격한 변화 없이 관성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만약 급격한 반전이 있다면 그것은 때때로 베토벤의 비창소나타처럼 하나의 독창적인 곡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악보를 만들어 나가지만 그 누군가를 위해 작곡하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나의 예술, 그것은 고스란히 나의 삶에 남고,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세상에는 수많은 곡들이 존재한다. 베토벤의 교향곡과 같이 운명적이거나 리스트의 라캄파넬라와 같은 화려한 곡도 있지만 전통 민요도 존재하고 지루한 돌림노래도 존재한다. 멜로디를 따라한 표절곡도 있을 것이며, 국가를 위한 애국심의 곡, 절망을 표현하기 위한 단조곡, 때로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같은 곡도 존재한다.

어떠한 곡이든 그것이 아이튠즈에 올라가 재생될 수 있는 기회는 평등하다. 다만 나는 베토벤의 열정소나타 같은 곡을 듣고싶다. 그리고 각자는 서로 다른 곡을 재생할 것이다.

우리가 투영하는 세계는 모두 우리 자신에서 부터 나온다. 마치 씨앗이 뿌리를 내릴 곳을 찾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생명력의 씨앗을 자신이 꿈꾸는 세계에 따라 그것을 현실의 세계에 뿌리내리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잡초나 거대한 나무나 인간이나 동등하다. 다만 다른 형태로 세상에 태어나 각자 다른 꿈을 꾸고 살아갈 뿐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꿈은 가치 있지만, 존재 그 자체는 가볍다. 생명이 지구에서 탄생 한지는 30억년 정도이며, 우주의 나이는 138억년 쯤 된다. 지구가 태양에 타 들어가도 우주는 그대로 있을 것이며 또 다시 생명이 탄생하거나 다시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꿈은 기생충이 동물 몸 안에 들어가 양분을 섭취하는 것과도 같으며 모든 존재는 대단히 큰 의미도 목적도 없다. 다만 삶을 즐기며 생명을 유지하다가 번식하고 소멸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존재한다. 희망이란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따라서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희망이나 사랑 같은 존재는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생명이 있기에 사랑이 존재하고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 니체가 본다면 힘에의 의지들의 싸움이 이기고 지는 일련의 과정일 것이며, 10년전 친구와의 말다툼에서 승리한 것이 큰 의미로 남아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처럼 생명들의 싸움도 사실상 하나의 이야기로 남을 뿐이다. 참을 수 없는 모든 존재의 가벼움이란 어쩔 수 없구나!